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의 광활한 알 울라(AlUla) 사막에는 바람과 모래가 빚어낸 기암괴석 사이로 인간이 만든 기적 같은 조각품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2008년 사우디아라비아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우디아라비아 알 울라 ‘헤그라(Hegra)’입니다. 현지에서는 ‘마다인 살레(Mada’in Salih)’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요르단의 페트라와 같은 나바테아 문명이 건설한 그들의 두 번째 수도이자 남부의 거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경전에서 ‘신의 저주를 받은 땅’으로 언급되면서 오랫동안 현지인들조차 접근을 꺼렸고, 덕분에 2,000년 전의 모습이 훼손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거대한 바위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무덤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침묵의 도시로 안내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
1. 외로운 성: 미완성이 남긴 단서
헤그라 유적지에서 가장 유명하고 압도적인 건축물은 ‘카스르 알 파리드(Qasr al-Farid)’입니다. 아랍어로 ‘외로운 성’이라는 뜻인데, 다른 무덤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과 달리 거대한 바위산 하나에 단 하나의 무덤만 홀로 조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높이가 아파트 4층 정도 되는 이 건축물은 사실 성이 아니라 ‘리흐얀의 아들 쿠자’라는 인물의 무덤입니다.
이 건축물이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미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상단부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지만, 하단부는 거친 바위 상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는 나바테아인들이 비계(발판)를 설치하고 아래서부터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 망치와 정만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깎아 내려오며 작업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이 고난도의 작업을 통해 그들의 석공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돌에 새겨진 저주와 문명의 융합
헤그라에는 총 111개의 거대 무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의 파사드(정면)를 자세히 보면 당대 유행했던 건축 양식의 종합 선물 세트와 같습니다. 지붕 위의 계단 장식은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양식, 처마의 둥근 장식은 이집트 양식, 그리고 기둥과 머리 장식은 그리스 헬레니즘 양식을 따랐습니다. 이는 나바테아인들이 향신료 무역을 통해 다양한 문명과 교류했던 국제적인 상인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페트라와 구별되는 헤그라만의 특징은 바로 ‘비문’입니다. 페트라의 무덤에는 글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헤그라의 무덤 입구에는 누구의 무덤인지, 그리고 무덤을 훼손하는 자에게 내리는 무시무시한 저주와 벌금이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이 무덤을 파헤치거나 시신을 옮기는 자는 두샤라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며, 1,000 드라크마의 벌금을 내야 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법적 문구들은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3. 사막의 생명줄: 물 관리 기술
연간 강수량이 극히 적은 사막 한가운데서 어떻게 대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었을까요? 헤그라의 지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수리 시설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빗물을 한 방울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바위 틈새에 130여 개의 우물과 저수조를 팠습니다.
자연적인 암반의 경사를 이용해 빗물이 저수조로 모이게 설계했으며, 지하 수로를 통해 도시 곳곳과 농경지로 물을 공급했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물 관리 능력 덕분에 나바테아인들은 척박한 사막에서도 대추야자, 올리브, 곡물을 재배하며 풍요로운 오아시스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물은 곧 권력이자 생존 기술이었습니다.
3-1. 페트라와 헤그라 비교
형제 도시인 페트라와 헤그라는 비슷해 보이지만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 구분 | 페트라 (요르단) | 헤그라 (사우디아라비아) |
|---|---|---|
| 지형적 특징 | 좁은 협곡(Siq) 속에 숨겨진 도시. 붉은 장밋빛 사암. | 탁 트인 평원에 솟은 독립된 바위산들. 황금빛 사암. |
| 보존 상태 | 비바람에 의한 풍화가 많이 진행됨. 비문이 드묾. | 건조한 기후와 고립 덕분에 조각과 비문이 매우 선명함. |
| 주요 유적 | 알 카즈네(보물창고), 수도원(알 데이르). | 카스르 알 파리드(외로운 성), 자발 이틀립. |

(이미지 출처: https://westwards.de/)
4. 현재의 의미: 깨어난 고대의 보석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던 헤그라는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개방 정책(비전 2030)과 함께 전 세계에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사우디 정부는 이곳을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면서도, 유적 보호를 위해 차량 진입을 통제하고 전기 카트로만 이동하게 하는 등 엄격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헤그라는 단순히 돌을 깎아 만든 무덤군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 무역로(Incense Route)의 영광과 사막을 극복한 인류의 지혜가 응축된 타임캡슐입니다. 석양 무렵, 황금색으로 불타오르는 바위 무덤 앞에 서면 수천 년 전 이곳을 오갔던 대상(Caravan)들의 낙타 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